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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95

[학술세미나] 한.중 고대 도작농경 문화에 대한 특별초청 학술강연회

작성일
1998.05.15
수정일
2023.03.31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782

 

韓·中 古代 稻作農耕 文化에 대한 特別招請 學術講演會

□ 목 차

1. 나락이 온 길 / 김택규
2. 중국 벼농사의 기원과 하모도의 벼농사 / 우호욱
3. 하모도 유적이 지니는 고고학적 지위와 영향 / 소구화


나락이 온 길

김택규(영남대학교 명예교수)

 1. 말머리에

지난 수천년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끝, 한국땅에는 이 대륙의 여러 갈래 문화가 모여 들어, 서로 충돌하면서 융화하고, 축적되면서 복합하여 韓文化로 재창조되어 왔다.  크게 보면, 북방으로 草原의 길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黃土의 길이, 그리고 남쪽으로는 바다의 길이 있었다.
초원의 길을 통하여는 기마·수렵문화와 황금문화가 들어오고, 그 상징은 찬란한 금관들이다.  서쪽 황토의 길은 주로 중륙대륙 華北의 길로, 이른바〈비단길〉이다.  이 길로 잡곡문화와 거대한 사상·종교단체체계들이 들어오고, 그 상징은 석굴암 대불을 비롯하여 황룡사, 미륵사 등 불교문화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사상사나 학맥의 연원이 된 유교문화 또한 황토의 길을 건너온 문화체계이다.  바다의 길로는 쌀의 문화가 들어오고, 이 수도재배문화는 우리나라 문화·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어 왔다.
쌀이 들어온 길에 대하여는 여러 학설이 있다.  대체로 남북이원설이 있고, 북방전래설이 있고, 남방전래설이 있다.  필자의 처지는 남방전래 즉, 바다의 길에 비중을 두고 있다.  이 글의 논지는 필자가 쌀이 온 길로 가설하는 바다의 길을 先着地인 현지에서 그 가능성을 물으려 하는 것이다.  
아래 이야기의 내용들은 필자가 그동안 발표해 온 여러 글에서 발췌한 내용을 근가으로 하여 약간의 새 관심을 더하고 있으므로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2. 韓國農耕文化의 始原

한반도에 있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 중에서 농경과련 유물이 출토되고 있는 유적의 분포를 보면, 현재의 북한지방에 훨씬 많은 유적들이 위치하고, 그 중에서도 평양부근의 대동강유역이 가장 높은 밀도를 나타내고 있다.  남한의 경우는 이와는 반대로 유적의 밀도가 산재적인 양상을 보인다.  그 비율을 보면, 북한지방이 약 79.2%, 남한지방이 20.7%를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수치를 근거로 하여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가지고 분석해보면, 한반도 내에서, 북한지방 특히 대동강을 비롯한 큰 강가나 해안에서 집중적이고 대규모의 인간점유활동이 있었으며, 반대로 남한지방에서는 상당히 산재적으로 인간이 생활한 것처럼 나타난다.
이러한 결과에 의한 해석은 자칫하면 오류를 범할 수도 있겠다.  즉, 농경의 전파를 생각할 때, 북쪽으로부터의 전파경로 위주로 생각하기 쉽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농경 특히 栽稻農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우리나라의 최한월평균기온 -3℃ 영역을 볼 때, 한반도의 중부지방 이남이 재도농경에 적합할 터인데, 남한지방에서는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아 그 밀도가 너무 엷다.  이는 남한지방에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농경관련 유적이 적은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발굴되지 못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충적세 (약 1만년 전)이래, 기후 변화가 거의 없는 안정된 상태로 현재까지 이르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한반도의 남부지방, 특히 큰 강을 낀 지역에서는 농경관련 자료들이 앞으로 발견되고 발굴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 같다.  또한 남한지방의 지형적 특성을 보면, 태백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서 동고서저의 독특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그 서쪽에는 큰 강들이 주로 서해안으로 흘러들고 있으며, 큰 강의 주변에는 상당히 넓은 충적평야들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인 조건이야말로 기후환경과 더불어 농경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은 상식적인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더 노력하고 관심을 가진다면 현재보다 훨씬 많은 농경관계유적과 유물이 발견되리라 기대해 볼만한 일이다.  그런데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아 북한지방에서 훨씬 많은 선사유적이 발견된 것은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정책적으로 이러한 유적발굴을 추진해 왔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도 생가된다.
남한에서는 선사문화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나, 조사에 비교적 소극적으로 임해 온 듯 하며, 60년대에 접어들어서부터 그나마 발굴조사가 조금씩 있어 온 듯 하다.  일천한 고고학 연구사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정도까지 진행된 것도 고고학계의 노고의 성과라 하겠다.  근래에 와서도 국토개발에 밀려 수습발굴·구제발굴이 성하기 때문에 보다 체계적이고 계획된 발굴·조사가 미흡한 실정인 것 같다.  정책적인 계획발굴의 미흡과 선사문화연구자의 절대부족이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의 대부분의 발굴이 화려한 유물이 출토되는 삼국시대 유적발굴에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향속에서도 극소수의 연구자들이 선사학 연구에 종사하고 있는 인상은 대단히 귀한 일로 생각된다.  
농경에 관련되는 유적분포에서 보면, 조, 콩, 팥, 기장, 수수와 같은 잡곡은 북한지방의 발굴사례에 훨씬 많이 보이는데, 이는 기후 환경등으로 미루어 보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남한지방의 청동기시대 유적 몇 곳에서는 탄화미와 볍씨 자국이 찍힌 토기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나, 이 정도의 자료만 가지고 栽稻農耕의 충분한 증거는 되기 어렵겠다.
근래에 일산지구 유적의 토탄층에서 탄화미가 대량으로 출토되어 학계가 주목하고 있는데, 연대측정이 다소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  만일 이 연대 측정치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이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는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탄화미가 출토된 토탄층은 토탄 자체가 탄소를 상당히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 유적에서 행한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의 결과에는 그 신뢰도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산지구 출토의 탄화미 자료가 가지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도작농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반월형석도와 홍도의 출토유적은 대부분이 북한지방에 분포하고, 특히 함경도 해안지방에 양자 동반 출토의 사례가 집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출토양상을 후술하는 도작농경에 보다 적합한 최한월 평균기온 -3℃선 이남의 영역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제까지 논의 되어온 稻作과 반월형석도와 홍도의 관계는 재고해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이상 남북의 발굴 경향을 참고한다면 그 성과들에 의한 '현단계'에서 결론을 내는데는 위험이 따르겠다는 생각도 해보는 터이다.  필자는 보다 조밀한 발굴 결과를 고대하면서, 후술하는 세시풍속을 통해서 본 필자는 한반도의 三大基層文化領域에 대한 試論이 남방기원설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음을 밝혀 둔다.

  3. 쌀문화 傳來의 經路와 時期

1) 水稻栽培文化의 傳來에 대한 諸說

가. 南北二元說
金元龍 교수는 일찍이 한국 재도농경의 전파경로에 대하여 陸路로 중국의 華北지방을 경유하여 전래하는 北路와 海路로 화남에서 전래하는 南路의 두 가지 가설을 세우고, 북로설의 橫山將三郞, 李春寧, 남로설의 安勝廣太郞을 비롯한 일본 농학자와 國分直一 등의 학설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김교수 자신은 먼저 화북에서 육로 이외는 생각할 수 없는 경로로 들어 온 黑陶와 반월형석도와 稻米의 전파를 연관지우고 있다.
반월형석도 다음에 한국에서 함경북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무문토기가 함께 발견되고, 일본의 彌生時代 유적에서도 많이 나오고 있는 有溝石斧와 재도문화를 관련지어 검토하였다.  유구석부를 중국의 華南지방 해안지대에서 발생하여 중국 대륙의 남서부, 필리핀, 폴리네시아군도로 퍼져나간 것으로 보이는 有段石斧의 한 변형으로 보고, 이것은 중국 福建·江西·廣東의 三省에 집중되고, 그 다음이 浙江省, 그 다음이 江蘇省, 그리고 安薇省으로 분포하고, 화북지방에서는 대단이 희소하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유단석부는 분명히 화남지방의 특징을 가진 석기이며,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뚜렷이 화남 기원의 유물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화북에서 육로로 북한지방으로 들어온 稻米와 화남에서 해로로 남한지방에 들어온 도미는 남북양로 피차 관계 없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 재도문화 전래의 실상이라고 김교수는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김교수는 또 한 가지의 거시적인 문화전파의 길을 가설하고 있다.  그것은 장래의 우리의 과제로서 유단석부의 전래와 지석묘의 전래가 직접적인 연관을 가졌으리라는 의문이었다.

나. 南方傳來說
金秉模 교수는 아시아의 巨石記念物과 卵生神話의 분포에서, 이들 문화의 원류를 동남아시아에서 찾고, 이 문화가 재도문화와 同源이며, 재도문화의 담당자들이 해류를 따라 그 문화를 한반도에 이식했다고 논단하고 있다.
그는 ① 아시아 지석묘들의 분포의 의미 ② 거석문화 담당자들의 경제와 사회 ③ 아시아에 있어서 거석문화 담당자와 난생신화의 관계라는 세 가지 自問을 설정하고, 그 해답으로,〈한국거석기념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첫째의 "아시아 거석문화의 분포"에 대해서는 선돌, 석관묘와 고인돌의 분포에서 해답을 얻으려 하고 있다.  선돌은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중앙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이것은 석관묘나 고인돌의 분포지역과 거의 겹치고 있다.  고인돌은 중국 본토의 중원지방에서는 어떤 지역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나, 중국과 시베리아를 제외한 거의 아시아 전역에 걸쳐 "선돌이나 석관묘의 분포와 비슷하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대 아시아의 거석문화 담당자들이 수도재배민임을 논증하고 있다.
둘째의 질문 "거석문화 담당자의 사회와 경제"에 대하여서도 그는 지석묘의 부장물인 平底無紋土器, 圓低의 적색토기 그리고, 석검과 반월형석도를 들어 해답을 구한다.  이 가운데 '붉은 토기'와 '석검'은 장례용으로만 쓴 것 같으나, 반월형석도는 수확도구로서 북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발전했고, 더 추운 지방에서는 이 칼이 한냉한 기후에서 나온 식물의 수확에 사용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벼의 수확에 적합했을 것이라 하여, 이 무문토기나 지석묘 제작자들은 수도재배민이었다는 것이다.
셋째의 질문 즉, "난생신화와 지석묘"의 관계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와 중국의 사서 《후한서》, 《삼국지》등에 비치는 우리 고대신화의 특색인 북방의 천자탄강신화와 남방의 난생신화의 구조에서 양자의 특징을 추출하고, 재도문화와 난생신화를 결부시키고 있다.  이 문제는 일찍이 관심들이 있어 왔으나, 고고학적 자료에서 추출된 것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즉, 한반도 북부의 천자탄강신화와 동남아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남부의 난생신화의 두 가지 유형을 보고, 전자의 원류를 Altai어 사용권에서 찾고, 후자는 동남아시아의 재도문화와 同源의 문화로 논증하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재도문화 전래 이전은 유목민이었을 것이라는 논지에 대해서는, 재도문화단계 이전에 火田 등에 의한 오곡 재배와 그 이전의 狩獵·漁撈·채집문화를 想定하고 있는 필로서는 좀 더 천착의 여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재도문화가 黑潮의 해류를 따라 남한에 전래되어 北上, 확산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필자에게는 크게 참고가 되는 연구라 생각한다.

다. 北方傳來說
沈奉謹 교수는 재도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사를 정리하고, 우리 경우의 부진한 상태를 일본 도작농경의 전수과정에 대한 연구사와 대비시켜, 국내관계 문제를 일괄해서 보고하고 있다.  심교수는 먼저 김원룡·이춘녕 교수의 이 관계 논문을 비롯하여, 일본의 재도농경의 기원과 일본에서 재배한 일본형 벼의 전래경로에 관한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하여, 북방설, 남북이원설, 자생설 등 네 가지 계열의 학설로 유별화 하여 검토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도작농경의 시원〉에 논급하여 먼저 중국에서는 B.C. 4,000∼3,000년경의 仰韶村遺蹟과 BC 7,000∼6,000년경의 浙江省河姆渡村遺蹟이 가장 이른 것이며, 일본의 板村, 有田 유적은 대체로 BC 300년 전후로 보면서, 한국재도문화의 시원에 대하여 늦어도 BC 700년 경에는 우리 재도가 시작되었을 것이라 하고 있다.  "결국 한국·일본의 도작농경 전파과정은 현재의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한다면 남방설과 자생설은 일반 논리상에서 많은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단계로서는 수긍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 古代米는 華中以北地域을 출발하여 한국에 육로 또는 해로로 전파되었다는 북방설이 가장 유력할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이 결론은 최근에 정리된 심교수의 논문에서도 대차 없이 정리되어 있다.
이상 주로 김원룡·김병모·심봉근 세분의 논문을 중심으로 고고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재도문화의 시원과 전파과정에 대하여 접근해 보았다.
여기서 필자의 솔직한 소감은 적어도 '현단계'의 발굴사례로써 수도재배의 전파경로를 단정하기는 어렵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도문화가 동남아에서 화남을 거쳐 중국의 해안지방을 화중·화북으로 북상하여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다시 남하했다는 지배적인 학설들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거의 전역에 재도문화가 정착하는데는 적어도 비교적 溫暖多濕한 三南에서 북상 확산되었으리라는 필자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物證이 논거가 되고 있는 한 '현단계'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2) 水稻栽培文化의 傳來時期
〈한국의 환경변천사와 농경의 기원〉에 관한 지리학계의 한일합동의 한 조사보고는 수도재배의 남방전래설의 가능성을 뒷받침해 줄 듯한 중요한 稻化紛에 대한 측정연대를 제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한반도를 경유하는 아시아대륙문화 가운데서 일본문화에 혁명적 변혁을 일으킨 벼·메밀·조 등의 재배작물이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서 일본열도에 전파된 것인가를 밝히기 위하여, 한국에서 수도재배와 잡곡재배의 기원을 밝히고, 일본열도로 건너간 그 전파경로를 해명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조사보고다.
남한 각지 20개처의 지표하에서 泥土를 채취하여, 그 속에서 특히 稻化粉과  子를 분석한 이 조사보고서는 한반도에 있어서 재도농경의 기원과 전파경로를 시사하는 植生圖와 중요한 연대측정의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식생도에서 주목되는 것은 후술하는 1년중 1월의 평균 온도 섭씨 0℃선과 지도상의 남부상록광엽수림대 〔照葉樹林帶 A〕가 거의 일치하며, 섭씨 영하 3℃선이 남부 난온대 낙엽광엽수림대 B, C 와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A, B, C의 광엽수림지대는 현재는 깡그리 남벌되어 赤松과 禿山의 분포지역으로 변하고 있다.  참고로, 위의 A, B, C를 김연옥은 暖帶林(A), 北部溫帶林(B), 中部溫帶林(C)으로 표시하고 있다.
필자는 후술하는 稻化紛의 측정연대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섭씨 0℃선 즉, 상록광엽수림대(A)를 따라 한반도의 서남부에 전파된 재도문화가 동남부로 전파되어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또, 대체로 난온대 낙엽광엽수림대(남부B)를 거쳐 난온대 낙엽광엽수림대(북부C) 지대로 벼농사가 확산되어 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자료들은 稻米의 남방전래를 생각하면서도 25개 항목의 입증 기능자료〈표 2〉에서 미처 제시 못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연대측정에 앞서 이때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 검토하여, 일본과 한반도에 재도농경이 전파되었을 가능성 있는 경로를 다음의 다섯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화북에서 북한을 거쳐 한반도를 남하하여 北九州에 이르는 루트,
② 위의 루트 남쪽을 따라 육로를 거치지 않고 발해만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한반도의 북서해안에 도달하여 남하는 루트,
③ 화북에서 산동반도를 거쳐 황해를 횡단하여 한반도의 남서해안에 전파되어 북구주에 도달하는 루트,
④ 양자강 하류에서 동지나해를 횡단하여 한반도의 남부와 북구주에 거의 동시에 도착하는 루트, 그리고
⑤ 화남에서 대만과 일본의 남서제도를 거쳐 구주 남부에 도착하는 이른바 남도의 해상의 길, 위의 다섯가지 경로를 앞페이지와 같은 지도로 표시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한반도에 있어서 도화분의 출현시대는 현시점의 분석결과에 한하여 볼 때, 한반도의 서남부가 이르며, 동남부·서남부로 갈수록 늦어진다.  전남의 나주에서는 약 3,500년전경의 벼의 화분이 출현하고 있다.  남동부의 경남 김해군 대동면 예안리 유적에서도 적어도 3,000년전 무렵까지 벼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또 경남 울산시 방어진에서 재도에 의하여 광범한 삼림지대의 파괴가 일어난 것은 2,300년전경이다.  북동부의 강원도 고성군 속초시의 영랑호에서는 稻屬화분의 출현연대가 1,400년전경이며, 인천에서는 2,500년전의 泥炭層이 현재 논으로 사용되고 있어, 정확도는 기대하기 어려우나 그 이탄의 하부에서 도속의 화분은 검출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는 위의 측정연대를 요약하여, 한반도에서 재도의 흔적이 인정되는 가장 오래된 측정치는 남서부에 있어서 3,500년전 무렵이며, 명백한 연대 결정이 행해지고, 재도에 의한 삼림파괴가 인정되는 동남해안선은 2,300년전 무렵이다.  그리고 장래 새로운 해설을 구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는 하나, 한반도의 재도기원의 시기는 일본의 북구주와 큰 시대차가 없다는 것이다.  이 전래된 시기의 선후문제는 한반도의 서남부에 먼저 전래하여 일본에 건너갔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필자와 견해를 달리하는 점이다.
이상의 고찰 결과, 이 보고서는 앞에서 인용한 다섯가지 재도문화전파의 경로 가운데서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한반도의 남서부에 도착하는 ③의 경로이거나, 양자강 하류에서 동지나해를 횡단하여 한반도의 남부와 일본의 북구주에 거의 동시에 도달하는 ④의 경로가 지금으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짓고 있다.
여기에서 추정된 재도문화의 전파경로 가운데서 ④의 경로는 필자가 제시한 가설 즉, 한반도 남서부에 상륙한 재도문화가 상록광엽수림대를 따라 동남부로 확산되고, 서해 연안을 따라 서북부로 확산되어 갔으리라는 고찰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가설은 지표하에서 채취된 이탄층에 포함된 도화분의 측정연대로써도 입증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식물분포와 농경문화의 관계 및 그 전파경로는 토양의 분포와도 일치되는 듯하다.  낙엽수림대의 갈색토양은 한반도의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산동반도나 遼河유역의 식생·토양과 일치한다.  남부연안·도서지역의 상록광엽수림대의 赤色土토양은 九州나 華中의 그것과 부합하고 있다.  오늘날의 농경재배에 있어서, 수도가 탁월한 화중과 한반도 남부와 일본의 구주가 동일한 토양이며, 田作이 우월한 山東省이나 遼寧지구나 한반도의 중부이북이 생태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우리의 농경문화를 생각하는데 중요한 시사가 될 것이다.

  4. 韓國 農耕文化의 二元性쌀과 基層文化領域

1) 農耕文化의 二元性
필자는 추석과 단오라는 명절이 수도재배문화와 잡곡재배문화에 관련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농경문화의 이원성에서 삼대기층문화영역을 상정하였다.  그리고 단오절·유두절·백중일 등의 기능을 중국과 일본의 嘗祭에 대응시켜 잡곡의 薦神儀禮 즉, 잡곡栽培의 수확의례로 보았던 것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의 변진조에 "토지가 기름지고 좋아서 오곡과 벼를 심기에 알맞다"고 기록했을 때, 이 오곡에는 분명히 쌀이 들어있지 않고 조, 기장(수수), 콩, 보리와 피(혹은 삼?)를 가리키는 것일 듯하다.  물론 중국의 기록에는 오곡 외에 六穀, 九穀등도 보이나, 여기의 五穀은 쌀을 제외한 잡곡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잡곡들이 언제부터 한반도에서 재배되었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중국의 화북지방에서의 재배가 기원전 2,000년대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고대에 중국의 동북지방까지 힘이 미쳤던 한민족도 조의 재배에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익숙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85년의 한 보고에 의하면 평안남도 평양시에서 가까운 北京遺蹟 36호 주거지에서 출토한 炭火栗이 기원전 1,500년을 가리키며, 황해도 봉산면 지탑리의 유적에서 출토된 조 혹은 기장으로 보이는 탄화물은 기원전 2,000년대의 곡물이라고 한다.  그밖의 자료에 의해서도 기원전 1,500년대에는 잡곡재배가 일반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조와 기장의 선후관계는 의문이나 보리의 전래는 조나 기장보다 후대의 일인 것 같다.
수도재배의 기원은 방사성탄소연대를 중시하면 BC 1,000년대, 고고학적 유물의 형식 편년에 의하면 BC 6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튼 잡곡은 적어도 도미전래 이전에는 한민족의 主食이었고, 수도재배가 전래된 이후에도 조·수수 등은 단오권, 복합권의 많은 지역에서는 후대까지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콩은 중국의 동북부(만주)가 원산지라는 것이 거의 정설화되어 있는 듯한데, 한국에도 야생종의 콩이 여러 가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원산지에 가까운 한반도에서 콩의 재배는 대단히 오랜 것으로 생각된다.

2) 三大基層文化領域
필자는 모든 문화사상과 문화요소들이 역사·시간의 축과 사회·공간의 축이 교차하는 좌표상의 어딘가에 위치한다는 전제하에 한반도의 삼대기층문화영역을 제시하였다.  한민족과 한문화를 단일민족, 단일문화로 인식하게끔 형성시켜 온 기층문화의 지역적 성격을 수도재배문화와 잡곡재배문화 및 양자의 복합문화로 크게 나누어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현존 民俗事象에 대응시켜, 추석권과 단오권 및 추석·단오복합권으로 명명하여, 삼대기층문화영역으로 설정해 본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중서부에 首都문화복합권을, 중동부의 삼각지대에 또 하나의 복합권을 상정하였다.
위의 가설은〈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사문화를 비롯하여, 고분문화, 삼국시대, 고대의 신앙과 제의, 민속연회, 민속신앙, 의·식·주의 양식, 방언, 사회제도와 사회조직 등, 방계자료의 문화요소와 생활양태의 여러 측면에서도 논증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 흔히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어 보기 일쑤이던 통설에서 벗어나, 太白正幹을 경계로 하여 동서로도 나누어 볼 수 있으리라는 가상도 위의 가설의 바탕에 깔려 있다.  민요나 무가, 민가유형 등의 분포에 착안한 것은 이런 생각에서였다.
여기에서 문화영역, 문화의 지역성의 의미에 대하여 일단 짚고 넘어가야할 필요를 느낀다.  필자는 앞에서 얘기한 삼대기층문화영역을 가설할 때, 기왕에 있어 온 비엔나 학파의 이른바 문화권설(Kulturkreislehre)과 미국인류학자들이 한 때 주장한 문화영역(Culture area)론에 관련시켜 논급한 바 있다.  즉, 전자는 비엔나 학파의 진영자체 내부에서 이미 거의 붕괴되었고, 후자에 대해서는 후대에 무시되거나 버려진 경향임을 참고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가설한 기층문화영역은 한반도를 하나의 동질적 문화권으로 보고, 그 속에 있는 문화경계(Culture boundary)정도로 우선 생각하여 그 학설사적 검토는 뒤로 미루었다.  결국 동질적 문화로 인식되어 온 한반도에 있어서 보다 기층적인 문화의 지역차를〈기층문화영역〉에서 찾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1989년에〈朝鮮先史時代의 地域性〉이란 강연에서 김원룡 교수는 미국 지리학계에서 말하는 등질지역(homogeneous region)과 결절지역(nodal region)의 이론을 빌려 비교적 명쾌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나, 상론은 할애한다.
이 강연에서 또 주목되는 것은 연중 1월의 평균온도가 섭씨 -3℃가 되는 선 (대체로 군산에서 원산으로 U자형을 그리는 선)을 한반도의 중부에 설정하여 남북문화의 경계로 삼고 있는 점이다.  즉, 태백산맥에서 서남방향으로 충청남도 금강의 북쪽을 금강과 거의 평행하여 뻗어 있는 차령산맥 남쪽의 1월의 평균온도가 -3℃의 경계이며, 그 남쪽은 -3℃보다 높아진다.  실은 이 차령산맥 이북이 대체로 북의 고구려와 남의 백제·신라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라와 백제의 경계는 태백산맥의 남단에서 서남으로 달리는 소백산맥이다.  금강과 차령산맥에 의하여 남북의 문화영역경계를 나눈 것은 필자가 제시했던 남한강과 소백산맥의 선을 비판하고 수정해 준 경계선으로 보인다.
다시, 이 -3℃보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동쪽으로 포항에서 서쪽의 목포로 해안선을 따라 나가는 선이 겨울 1월의 평균온도 0℃선이다.  그리고 이곳은 강우량이 1,500㎜이상이고, 식생은 난대의 상록광엽수림지대이다.
이 -3℃선과 0℃선은 필자가 기층문화영역으록 가설하고 있는 추석권(수도재배문화)과 단오권(잡곡재배문화권)에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필자는 한반도에 수도재배문화가 전래된 경로에 대하여 상술한 바와 같이〈남북이원설〉이란 중국 화북→육로→한반도 서남부의 두 경로를 통하여 재도문화가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학설이다. 〈북방전래설〉은 화남→화중→화북→무문토기문화→한반도 남하→일본열도의 루트로서 한 때 지배적이었던 주장이다. 〈남방전래설〉은 화중 (양자강 혹은 淮河(澮水) 하류지역→한반도 서남부 (전남의 지석묘 밀집지대)의 경로이며, 여기서 다시 한반도를 서북부로 북상하고, 동남부로 확산된 것으로 필자는 생각해 온 것이다.
수도재배와 오곡재배를 기반적인 생산수단으로 삼아 온 한국의 기층문화의 지역성에 대한 하나의 가설로서 세영역을 필자는 설정해 보았던 것이다.  한국의 역사·사회·문화의 여러 측면을 통하여 지역적으로도 그 특성을 유형화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표 2〉참조) 이들 각 영역의 기층문화가 한국사의 진전에 따라 한반도 내에서 큰 문화복합을 이루었으리라는 발상이다.
소백산맥과 금강유역을 따라 동에서 서로 선을 그어 보면, 대체로 이 동서라인의 북쪽이 단오권이며, 그 남서부가 추석권, 그리고 동남이 추석단오복합권이 된다.  낙동강의 상류지역에 해당하는 경상도의 북부지대 즉, 소백산맥의 남록일대는 북과 남의 양문화의 접촉 지역으로도 보이고, 이 선이 대체로 단오권과 추석·단오복합권의 경계가 될 것 같다.
楸哥嶺地溝帶와 태백산맥 및 남한강의 흐름을 저변으로 하고, 북한강을 가운데 끼는 삼각지대 즉, 대체로 강원도 일대는 북방의 단오권과 중서부의 수도권의 복합권으로 보이나, 현재로서는 모든 문화요소의 조사가 가장 미흡한 지역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곳은 수도권이다.  한국은 통일신라의 수도는 논외로 하더라도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서울지역은 천년이상을 두고 수도권이다.  모든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이며, 한반도의 모든 문명과 문화가 집결된 곳이다.  따라서 거의 특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한반도의 중서부 특히, 서울·개성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일대는 각지의 문화가 다층적으로 복합된 곳으로 생각된다.
소백산맥이 남하하는 라인 즉, 속리산·가야산·지리산 등의 산괴를 지나 남해안까지 남행하는 선으로 한반도의 동남부의 추석·단오복합권과 서남부의 추석권으로 나누는 또 하나의 영역의 경계를 지어 볼 수 있다.
위의 문화영역 중에는 더욱 세분할 수 있는 지역이 있고, 또 그 지역마다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낙동강에는 7大支流가 있고, 고대의 가야 12개국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도 어느 정도 문화적으로 지역적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대체적으로는 3領域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데, 남서부의 추석권의 부여 부근에서 恩山別神이 발견되기도 하고, 동남부 경상북도의 남쪽의 慈仁 일대에 대규모의 단오굿이 관행되고 있기도 하다.  특히 해안선을 따라가면, 남서부 전라남도 해안에 많은 원무 '강강술래'와 같은 계열로 보이는 '재넘자'가 경상남도 울산지방에도 남아 있고, '월월이청청'이 慶北 盈德郡 老物里에도 보이고, 심지어 安東 琴韶洞의 '지애(기와)밟기' 등도 분명히 같은 구조의 女性群舞로 보이는 것이다.  이처럼 같은 유형의 원무가 동해안을 북상한 어촌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더욱이 이 유형의 원무는 명칭은 다르지만 소백산맥 남록의 내륙지대인 안동과 義城 근처의 내륙농촌에까지 '기와밟기', '놋다리밟기' 등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탈놀음, 농악, 민요등에도 사례는 많으나 생략한다.
아무튼 세부조사가 태부족인 현단계이기는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단오권·추석권·단오추석복합권으로 대충 나누어 본 3대영역의 가설에 바탕을 두고, 앞의〈표 2〉와 같은 자료를 만들어 본 것이다.  물론 〈표 2〉중의 문화요소 가운데는 미조사의 부분도 있고, 불충분한 유추와 거기에다 또, 필자의 억측의 테두리에 머무는 事象도 있기는 하나, 대체의 윤곽을 잡을 길잡이는 될 것으로 생각된다.

  5. 韓文化와 栽稻文化

필자는 水稻栽培文化가 "바다의 길"로 南쪽에서 건너와 한반도 서남부에 선착하여, 상록광엽수림대를 따라 확산되었으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논증하기 위하여 선사문화의 발굴성과와 문헌기록 및 현존 民俗事象에서 한반도의 三大基層文化領域을 想定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몇가지의 의문을 남겼는데, 첫째 栽稻文化는 그 담당자들이 그들의 문화와 함께 稻米文化를 가져왔을 터인데, 어디로부터 왔는가?  둘째, 그 '물길'을 어떤 航海術로 바다를 건넜으며, 어떤 海路인가?  셋째는 현재 한국의 文化事象에서 어떤 文化要素들이 栽稻文化의 原流에 대응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의문들에 대하여 근자 일련의 中·日 학자들은 뜻있는 示唆를 주고 있다.  이하, 필자의 사견을 가하지 않고, 몇몇 논지들을 소개하여 참고로 삼는다.
먼저, 水稻栽培의 기원과 그 전파과정이 관심의 대상이 된다. 
遊修齡 교수는 중국 野生稻가 江淮지역에서 밀집적으로 발견된다는 전제하에 稻作의 기원을 長江下流 지역 특히 가장 이른 河姆渡 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江南지역으로 잡는다.  이 지역에서 黃河流域으로 北上하여 東夷族 중심으로 分布하고, 南으로는 江淮平野에 이르는 과정에서 東夷越族의 '前頭部落'이 이미 中原文化와 어느 정도의 융합을 이루는데, 이들이 稻作文化를 가지고 갔기에 朝鮮의 稻作起源은 이와 대단히 깊은 관계가 있을 터이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韓族이란 오랜 중국의 발전과정에서 秦韓이전에는 北方의 여러민족과 秦韓이후에는 南方으로 허다한 민족과 융합하여 이루어진 민족의 칭호이다.  水稻의 起源은 일찍이 漢族형성 이전에 있었고, 이는 史前의 많은 南方民族 즉, 吳·越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吳·越人의 일부가 전쟁과 민족압박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日本과 朝鮮에 이르렀고, 이 때 水稻를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현재 日本語에서 稻를 뜻하는 '   '는 이 古越語의 稻의 音에서 前頭詞 '伊= '와 實詞 '緩= '의 合成語라고 한다.  그 이외에도 日語에는 '米' '麥' 등, 古越語와 對應관계를 밝힐 수 있는 말이 있고, 대응될 수 있는 地名, 動植物名도 대단히 많다면서 상론은 줄이고 있다.  전술한 '伊= ' '緩= '의  는 어쩌면 우리말의 '뉘'도 그 흔적이 될지 모르겠다.

中國新石器時代 出土稻遺存의 地理分布


위와 유사한 논지는 中國南方百越稻作과 南洋의 관계를 논한 遊교수의 논문에도 보이는데, 南下하던 一部가 北으로 향하여 日本에 도달하였다고 하고, 역시 水稻栽培를 가져갔다 하였다.  遊교수가 여기에서 日本에는 보이지 않는다고한 銅鼓에 새긴 靑蛙=雨師나 飛烏모티브는, 한국에서는 銅鼓는 아니나, 6세기 경의 土偶裝飾長頸壺에 靑蛙가 뱀, 男女교구象등과 함께 새겨진 것은 稻作文化의 南方(華中·華南)傳來를 생각하는데 참고가 될 것 같다.
다음으로 중국 江南지역과 한반도의 海上交易에 대한 毛昭日析 교수의 논고는 필자가 오래 고민하던 '바다의 길'을 생각하는데 중요한 示唆를 주고 있다.  毛교수도 역시 支石墓문제와 水稻栽培에 관하여 중국 江南지역과 韓國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먼저 金貞培교수의 논문〈한국과 요동반도의 지석묘〉에서 "요동반도의 지석묘는 대부분 '전형지석묘'로서 한국의 지석묘 (즉 북방식 지석묘)와 공통점이 있다"고 한 말을 매우 중요한 생각으로 보고, 요동반도의 '전형지석묘'와 한국의 '북방식 지석묘'가 같은 문화권 즉 濊·貊族의 문화유적에 속한 것이라면, 제주도와 한국 서남부 및 중국 절강성에서 발견되는 '변형지석묘'를 또 다른 하나의 문화권 혹은 상호간에 문화의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을까?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金貞培 교수에게서 받은 편지에서 "한반도에는 2만 여기의 지석묘가 있는데, 절강성에도 같은 형태의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은 史前시대에 두 지역간의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이러한 내용을 인용하고 이 견해가 틀림없다고 논단한다.
벼농사에 대해서 毛교수는 중국의 대다수 학자들이 長江의 중·하류지역에서 벼농사가 기원했다고 믿고 있는 경향과 같이, 黃河·淮河유역의 벼농사도 長江유역에서 발원한 벼농사가 전파된 것이라 믿고 있다.  1992년까지의 통계상에 보이는 112곳의 벼농사유적지 가운데, 長江 중·하류지역에서 86곳(76.8%), 황하와 회하유역에서 12곳(10.7%), 화남지구(광동, 복건, 대만) 8곳, 운남 4곳, 동북요령 1곳이라는 수치에서 가장 사례가 많고, 연대가 오래며, 또한 유적이 밀집해 있는 현상에서 長江유역을 고고학자, 농학자들은 중국 벼농사의 발원지로 보고, 이곳을 중심으로 벼농사가 北으로는 화북의 黃河유역으로, 南으로는 華南과 西南지구로, 東으로는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毛교수의 위의 논지는 필자가 생각해 온 華北지방에서 조, 기장, 수수 등의 잡곡재배가 들어오고, 華中에서 水稻栽培문화가 들어 왔을 가능성과 거의 일치하는 생각이다.  毛교수는 支石墓의 분포 및 전파경로와 稻作기술의 전파를 연계시켜, 陸路를 통한 전파경로는 아니었다고 단정하고, 해상통로를 생각한다.
"육상교통로가 불가능하다면 남는 것은 해상교통로 뿐이다.  그 중 가능성이 높은 해상교통로는 다음의 몇 노선이다.  첫째는 장강하류에서 산동반도 및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조선반도로 들어가는 노선, 둘째는 장강하류에서 산동반도를 경유한 다음 東海(黃海)를 가로질러 조선반도로 들어가는 노선, 셋째는 淮河下流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조선반도로 가는 노선, 넷째는 장강하류와 抗州灣 지구의 절강성에서 東北向하여 직접 조선반도에 도착하는 노선의 네 가지다."
이 가운데서 첫째 노선은 벼농사가 "조 재배기술과 공존"하는 정도로서 "요동반도가 벼농사 기술이 東傳되는 주노선은 아니었고" 두 번째 산동노선에 대해서도 고대의 산동은 조를 재배하는 지역이었으며, 첫째노선과 비슷한 문제점을 안고 있고, 세 번째 노선의 출발지점인 淮河下流는 출토유물의 빈약한 자료로서는 황해를 횡단하여 직접 조선반도에 전해졌다고 결론짓기 어렵다고 하였다.
이들 3노선 즉, 요동반도, 산동반도, 황하하류는 "벼농사 유적을 다 합해도 조선반도 벼농사 유적지 수의 절반도 못미치니" "가장 가능성이 큰 벼농사의 東傳路線은 네 번째 즉, 중국 江南지구에서 황해를 가로질러 직접 조선반도와 일본으로 전해지는 노선을 따랐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도 이 노선을 생각하고 있으나, 어떤 海流와 바람을 따라 적어도 3,000년 이상 이전의 사람들이 바다를 건넜을까 하는 의문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毛교수는 이 海路가 다른 세 노선에 비해 훨씬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는 중요한 示唆를 준다.
첫째, 이곳은 벼농사의 발원지로 그 주민들은 농경단계에 들어가면서부터 쌀을 主食으로 삼았고, 유적지의 수도 가장 많고, 밀집되어 있어, 장구한 세월을 두고 벼농사를 영위하였기 때문에 이들만의 벼농사의 전파자가 될 수 있었고,
둘째, "벼농사 기술을 전파시킨 그들은 벼농사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海上活動에 대한 경험과 기술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강남의 抗州灣과 그 줍녀지역은 동해에 접해 있다.  이곳 연안은 굴곡이 심하고, 항만 및 섬들이 많아, 고대인들의 해상활동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하여, 이들 선진시대의 강남인들이 海上漕運에 능했음을 논증하고, 그가 栽稻의 發源地로 보는 河姆渡 지역이 해안에 접해 있었고, 沿海에 있는 1,339개의 섬으로 구성된 舟山列島를 비롯한 3,300여개의 섬과의 海上交通등, 수천년간 쌓아 왔을 航海技術을 통하여 조선이나 일본, 그보다 더 먼 지역에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毛교수는 해석한다.
셋째로 毛교수는 海流와 季節風에 주목하여, 이 자연조건에서도 강남노선은 매우 뛰어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강남 동편의 해류는 매년 1월부터 4월까지는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5월부터는 동북으로 흐르기 시작하며, 6월부터 8월까지는 남에서 동북으로 흐른다.  9월부터 시작하여 익년 4월까지는 다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것이다.  조선업이나 항해술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 비교적 간단한 항해장비로 해류를 타고 중국 강남에서 바다를 가로질러 직접 조선반도에 도달하는 것이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통해 도착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적인 항로였던 것이다."
"계절풍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는 풍향이나 풍속이 계절에 따라 명확한 변화를 보인다는 점이다.  중국은 전형적인 계절풍 국가로 특히, 연해지구가 그러한데 겨울에는 북풍과 서북풍이 많으며, 여름에는 남풍, 봄에는 동북풍과 동풍, 가을에는 서풍과 서남풍이 많으며, 여름에는 남풍, 봄에는 동북풍과 동풍, 가을에는 서풍과 서남풍이 많다.  돛이 발명되고부터 계절풍은 강남 항로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논술하면서 毛교수는 海路에 관해서는 盛永後太郞 등의 『稻의 日本史』 (1966)에 게재된 海流圖를, 季節風에 대해서는 橋本進의 『徐福의 航海』를 참고하기를 권하고, 다른 3노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도, 先秦시대 중국 강남과 한반도간의 해상교류의 연구는 새롭고 중요한 연구관계라 결론짓고 있다.
苑利교수는 韓·中 문화의 비교에 있어서 北方文化傳來 위주로 고찰되어 온 경향을 반성하면서, 韓文化를 크게 泛東夷系統, 泛北越系統, 泛百越系統의 三系統文化가 복합구성되어 이루어진 複合形文化體로 보고 있다.  苑교수에 의하면 이들 3종 계통의 한문화에 미친 영향은 그 시기와 강도에 있어서 일치하지 않으나, 泛東夷系 영향의 주요한 표현은 선사시대의 有文土器文化 및 東北夷의 文化系統 속에 있고, 泛北狄 영향의 주요표현은 元代에 있으며, 泛百越系 영향의 주요 표현은 한국의 무문토기시대, 청동기시대 전후에 있다.
'東夷'라고 하나의 역사적 개념으로 말하고 있으나, 時期에 따라 거주지역에 따라 구별이 있다.  夏代의 竹書紀年에 보이는 九夷에는 韓民族이 포함되지 않고, 商·周 이후에야 韓民族이 '夷'의 범주에 받아들여진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無文土器 전래이전의 발해만 연안의 節文土器가 泛東夷文化系의 초기의 표시물이다.  현재 중국의 西南部의 苗族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에  族, 瑤族등과 渤海北岸에 거주하던 北方民族들이 黃帝, 炎帝 및 堯·舜·禹의 征伐에서 苗族이 패하여 일부는 北方으로 유입하고 다른 대부분은  ·瑤 등 민족과 함께 남쪽으로 유입한 민족이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濊貊族족 원래 중국의 東南海岸에 살다가 한반도에 진입한 것은 거금 3,000년전, 한국의 무문토기시대이다.  苗,  , 瑤 삼족이 東南沿海로 남하한 이후에 濊貊族과 접촉하여 貊族은 北上하여 발해만 北岸에 진입하는데, 여기는 원래 苗族地區였다는 것이다.
韓民族과 苗族의 생상습속, 음식습속, 거주습속, 혼인습속 등 허다한 공통점은 이러한 民族移動에 뿌리를 둔다하여, 그 사례로서『후한서 동이전 韓조』에 보이는 '繩貫背皮'의 풍습과 고대 고구려의 壻屋의 습속 등에 주목한다.  苗族의 문화와 한문화의 대비에서 고구려의 壻屋과 묘족의 馬郞房을 男女의 性愛와 擇偶儀式으로서 同源의 文化로 보고, 후대의 변화한 모습을 한국의 舍廊房과 苗族의 馬郞房의 습속을 유교문화가 미치기 이전의 양문화의 殘存으로 생각하였다.  나아가 중국 서남부의 壯族의 歌迂, 瑤族의 要歌堂, 布衣族의 浪哨, 黎族의 放寮 명절풍속과도 同源의 文化로 보아, 고대중국의 春社, 秋社와도 "一類的 活動"으로 대응시키고 있다.
苑교수는 이렇게 東夷, 苗, 濊貊 등의 3∼4천년전의 中國大陸안의 民族이동을 개관하고, 예맥족은 韓民族의 조상민족으로 이때까지 줄곧 북방민족으로 일컬어져 왔으나, 사료를 자세히 분석하면 南北雨貊이 있고, 이들이 대략 기원전 1,500년전후에 北上하여 韓半島에 進出하여 無文土器시대를 창조하였고, 기원전 221∼206년 전후에 빈번한 전란으로 "秦之亡人"으로 일부의 貊人들이 배를 타고 北上하여 직접 한반도 南端에 이르러, 당시의 馬韓人들의 도움으로 後來의 신라문화를 창립하였다.  東南연해의 貊民의 일부는 後來의 大吳越民族 속에 녹아들고, 그 일부는 서쪽의 雲貴高原으로 옮겨, 현재의 白族을 형성한다.
濊貊族이 북쪽으로 옮겨 南北雨貊(濊族포함)을 이룬 사실은 한반도의 원시습속과 언어습관에 중국의 百越民族과 서로 暗合하는 것이 대단히 많은 이유로 생각된다.  史前시대에 中國大陸에서 南北으로 크게 이루어진 민족이동과 古代 韓文化의 起源과 形成문제에 대해서는 古代 漢字語音의 연구에서 도달한 兪昌均교수의 학설이 있으나, 여기에서는 언급을 줄이기로 한다.
苑교수의 논문 가운데 제시된 한·중 양국의 비교문화론적 시각은 稻作文化를 비롯하여 음식습속, 건축문화, 복식습속, 성숭배습속, 나아가 체질인류학적 비교에까지 미치고 있다.  그가 제시한 文化要素들 가운데는 대단히 주요한 논급이 많으나, 여기서는 할애하고, 언어학적 시각에서 논급한 도작관계 어휘만 소개하는데 그친다.  그는 한국의 "쌀"의 어원을 중국고대에 찹쌀을 가리키던  (Se)에서 찾고, 韓語 "뉘"의 어원을  중국 南方의  (ni)에 두며, 百越文化圈에서 水田을 가리키는 才那(nuo)에서 우리말 "논"의 어원을 찾으려하고 있다.  쌀의 어원에 대해서는 'ㅄ' = 菩薩로 표기한 우리 고어에서 보아 그 대응관계가 의문이고, 禾尼에 대해서는 전술한 뉘-  - 에 생각이 미친다.  보다 깊은 뜻은 남겨진 과제라 하겠으나, 전파론적 시각에서 보면 주요한 注目이라 하겠다.

  6. 맺으면서

끝으로, 장래의 필자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는 과제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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